* 권고: 적당히 흘려가면서, 선별해서 읽기를 :)
목차
- 들어가는 말
- 어쩌다 우리는 누군가와 친밀해질 능력을 상실해 버렸는가
- 친밀성 상실이 미치는 영향
- 어떻게 하면 친밀성을 기를 수 있는가
- 나의 이야기
안녕하세요 월말 이정환의 이정환입니다.
한국을 살아가다 보니 어느 순간 싸늘함이 느껴졌다. 한국 사람, 분명 친절하다. 허나 왠지 모르게 싸늘하고 차갑다. '사람다움'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스쳐 지나가는 사이부터 자주 보는 사이까지) 특히 20대들, 서로 굉장히 지나치게 예의 바르고 친절하다. 그런데, 싸늘하다. (최근 독일 다녀온 후 더욱 실감한다)
싸늘한 친절함이 만연한 사회. 친밀성 상실의 시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모습이다. 이러한 현실은 대학에서도 쉽게 보인다. 대학 강의실에서 학생들이 어떻게 자리를 앉는지 보시라. 남자끼리 뭉쳐서 앉아 있고, 여자끼리 뭉쳐서 앉아 있다. 강의실에서 옆자리 사람과 대화 나누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서로 말 걸지 않는 것이 미덕이라 여겨진다. 얼마나 기이하고 이례적인 현상인가??
원래라면, 남학생은 이 강의실에서 가장 이쁜 여학생 옆에 앉으려고 애쓴다. 여학생은 가장 멋있는 남학생이 옆에 앉아주기를 기대한다. 이것이 정상이다. 왜?? 20대는 원래 이성에 미치는 나이기 때문에. (그렇게 미쳐보고, 상처받고, 버림받아 봐야 건강하게 성숙해진다) 그런데 그런 자연스러운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어딘가 이상하다.
심지어 카페에 와서 서로 대화하지 않고 카톡을 주고 받는다. 음식점에 가서 사진 찍고 인스타에 올릴 생각을 가장 먼저 한다. 친밀성 있는 사람과의 대화가 얼마나 즐거운지를 아는 사람은, 사진에 집착하지 않는다. 요새 사람들은 그런 대화에서 오는 유희와 즐거움을 모르는 듯 하다.
20대가 극심한 외로움을 겪는다. 20대가 사회적 병리 현상 수준으로 외로움을 겪는다. 원래 사회적 병리 현상 수준의 외로움은, 삶의 동반자를 잃은 60대 70대들이 겪는 문제였다. 이제는 20대가 겪고 있다. 역사에서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정말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정말 심각한 문제다.
친밀성 = intimacy = emotional warmth and closeness = the state of having a close, personal relationship or romantic relationship with someone = 우정, 사랑, 친밀함 등
- 어쩌다 우리는 누군가와 친해질 능력을 상실해 버렸는가
1. 물질적 풍요로움이 익숙한 세대
요새 청년들은 기성세대와 달리 굉장히 풍요로운 세대에서 태어났다. 기성세대는 풍요롭지 않은 세대에서 태어났기에, 풍요가 감사한 일인지를 잘 안다. 기성세대는 본인들처럼 청년들도 감사와 만족을 느끼며 살 것이라 생각한다. 허나 그것은 착각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청년들에게 풍요로움이란 기초 & 기본이다. 풍요로운 세상에서 태어났기에 풍요로움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풍요로움에 감사와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풍요로운 세상에서 태어났기에 오히려 기존에 없던 문제가 생겼다. 바로 (물질적) 풍요로움이 절대적 가치로 여겨지는 것이다. 물질적 풍요로움을 잣대 &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인생의 목적 & 목표도 오직 물질적 풍요로움을 달성하는 것이다. 정말 안타깝게도 많은 청년들의 목표가 그저 돈 많이 버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물질적 풍요로움은 쉽게 도달하지 못한다)
물질적 풍요로움만이 강조되다 보니, 물질적 풀요로움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무시되고 무가치화 되었다. 물질적 풍요로움을 위해 남을 앞지르는 것만이 중요시되었다. 그러니 사회가 더욱 경쟁이 치열해지고 과열된다. 옆에 있는 사람을 친구 이전에 경쟁자로 인식한다. 그렇게 정신적 풍요로움은 무시되고 잊힌다. (인생의 진짜 묘미는 정신적 풍요로움에 있거늘)
2. 자유에 대한 잘못된 인식
"야 나한테 간섭하지 말어! 건들지 말어!" 요새 사람들은 간섭받지 않는 것을 자유라 생각한다. 간섭받지 않는 것을, 간섭하지 않는 것을 미덕이라 여긴다. 하지만 이것은 실현되지 못하는 착각이다. 친밀한 사이에서는 반드시 어느 정도 서로를 간섭하고, 서로에게 간섭받을 수밖에 없다. 간섭 없는 친밀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친밀한 사이,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나의 사소한 말과 행동도 상대방에게 간섭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때때로 간섭을 넘어서 약간의 침범까지도 가기도 한다. (그럴 땐 확실히 서로 의사소통하여 합의봐야 한다)
그렇다면 요새 사람들이 원하는 자유란 무엇일까? '간섭'받지 않을 자유가 아니라 '지배'받지 않을 자유다. 요새 언어로 번역하자면 가스라이팅 당하지 않을 자유다. 가스라이팅은 간섭이 아닌 지배에 가깝다. 간섭은 기본적으로 상대방의 스타일을 존중하되, '혹시 이것은 어때?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떨까?' 한번 물어보는 느낌이다. 지배는 상대방의 스타일을 내 입맛대로 바꾼다. 상대방의 스타일을 내 손아귀에 올려놓으려한다. (물론 간섭도 지나치면 안된다)
좀 더 쉽게 설명해보겠다. 돈 엄청 잘 버는 남편이 있다. 남편이 와이프에게 카드를 줬다. 와이프가 그 카드로 무엇을 하든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만약 남편이 언제든지 그 카드를 뺏을 수 있다면?? 이것이 지배이다. 이런 상황이 진짜 무서운 것이다.
간섭받지 않을 자유를 미덕이라 여기고 선망하는 분위기에서 20대가 살아왔다. 그렇다보니 누군가와 상호작용을 하려 하지 않았고, 누군가와 친해지는 방법을 모르는 세대가 되었다. 간섭받지 않을 자유를 좇다 보니, 건강한 간섭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랑은커녕 우정조차 사라진 세대가 되었다.
3. 친밀성의 의미가 달라졌다. 시대가 변했는데 의식이 따라가질 못한다
친밀성, 그 의미가 많이 달라졌다. 내가 어렸을 적만 하더라도 부모끼리 친하면 자연스럽게 부모의 자식들과 친해졌었다. 함께 여행을 다니기도 했었다. 즉, 주체적으로 누군가와 친해지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가족 단위로 친밀성이 형성되었다. 따로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친밀한 사이가 만들어졌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세상이 달라졌고 시대가 달라졌다.
옛날에는 친구를 '다른 나'라고 생각했었다. 모든 순간, 모든 것을 함께하는 것을 친구라 생각했었다. 총체적으로 전인격적으로 친해야 친구라 생각했었다. 상대방의 가족 이야기, 상대방의 약점 등 모든 것을 알아야만 친구라 생각했었다. 이제는 그렇지 않다, 시대가 달라졌다. 나와 모든 걸 함께 하는 친구란 없다. 우리는 그것이 불가능한 시대 & 환경에 살고 있다. 만약 현대 사회에서 모든 것을 공유한다면, 미래에 반드시 서로 악마가 된다. 우리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살고 있다. 친구, 연인, 부부, 가족 간에 다 적용된다. 모든 것을 나누면 안된다.
가끔 연인이 아쉬움을 토로할 때가 있을 것이다, "왜 나한테 다 안 말해줘?" 어떠한 심정인지는 이해된다. 그러나 끝까지 상대방이 말하지 않는다면 이제는 받아들여야 한다.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시대는 끝났다. 그렇다고 해서 저런 아쉬움을 느끼는 것이 잘못이라는, 저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다만 상대방이 거절한다면, 상대방의 선택을 존중하고 인정해줘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사람들은 착각한다, 친구에게만 털어 놓을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고. 왜 그렇게 생각할까? 친구에게만 털어놓고 싶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면, 책잡힐 것 같아서다. 친구에게는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친구는 책잡지 않으리라 믿어서. 사실은 그렇지 않다. 어차피 친구도 책잡는다. 어떠한 친구든지 간에 결국 책잡는다. 많이들 경험해보지 않았는가? 특히 여성분들은 더욱 강렬하게 경험해보지 않았는가??^^ 특정 사람에게만 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란 없다.
친구란 누구에게나 가능한 좋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이다. 친구니깐 모두에게나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더 깊고 재밌게 나누는 것이다. 절대로 귓속말하고 비밀을 나누는 사이는 친구 사이가 아니다. 친구란 그런 게 아니다. 그저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인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한다면... 아 정말 너무 싫다, 견딜 수 없다^^ 들을 필요 없는 이야기, 알 필요가 없는 이야기를 굳이 들을 이유가 있는가??)
사실 세상 모든 것이 그렇다. 이쁜 옷을 보면 사고 싶어 진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이쁜 옷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옷이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에만 찾아서 본다. 원하는 것을 적절한 때에만 취하려 한다. 이것이 정보 & 지식이 넘치는 사회,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회를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끝도 없는 것을 다 보고 취하려 하면 괴로워진다. (유튜브, 쇼핑몰, 인스타 등) 괴로워지기 가장 쉬운 방법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취하는 것이다. (아 근데 사람은 좀 다르더라. 매력적인 사람은 봐도 봐도 좋다^^)
4. 변질된 병적 사랑
우리 사회는 너무나도 쉽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한다. "내가 그동안 너를 위해서 해온 게 얼만데,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이런 말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둔갑된 집착, 폭력, 소유욕이다. 변질된 병적 사랑이다. 다 본인이 하고 싶어서 한 것이면서, 마치 나를 위한 것처럼 사기 친다.
두 사람이 만나면 반드시 권력이 생기기 마련이다. 부모 자식 관계도, 친구 사이도, 연인 사이에도 다 권력이 있기 마련이다. (흔히들 말하는 '밀당'도, 결국 두 사람 사이의 권력을 두고 일어나는 일이다) 이러한 변질된 병적 사랑은, 한쪽이 둘 사이의 권력을 다 소유하려 한다. 극단적으로는 둘 사의 권력을 넘어서서, 상대까지 소유하고 지배하려고 한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건강한 사랑은 그렇지 않다. 건강한 사랑은 둘 사이의 권력을 함께 소유하고 조율해 나간다. 그렇다면 왜 이런 변질된 병적 사랑이 나타날까??
바로 사랑을 감성적, 정서적 차원에서만 다뤄서다. 허나 사랑에는 반드시 '앎'과 '존중'이 필요하다. 감성적, 정서적 차원으로 다뤄지기 이전에, '앎'과 '존중'이 반드시 필요하다. 쉽게 말하자면 상대방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상대방의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는 수준의 관심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관심 없는 사랑, 앎과 존중이 없는 사랑은 압박이자 폭력이다.
가끔 여자들이 묻는다, '나 이뻐?' 남자들, 이럴 때 망설이면 안 된다. 망설이는 순간 죽음이다. 재깍 대답해야 한다, "응 당연하지". (사실 여부와 진실 여부 따위는 중요치 않다) 그러나 때때로 여자들이 이 대답에 만족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여자들이 다시 묻는다, "어디가?" 이때는 과연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어디가 이쁜지 구체적으로 찾으려 하면 안된다. 구체적으로 어디가 이쁜지를 정확히 답하라는 것이 아니다. 질문의 의도는 어디가 변했는지를 맞춰보라는 것이다. 심정 변화, 외모 변화, 상태 변화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 변화를 알아차리고 대답해야 한다. '내가 분명히 변한 게 있는데, 니가 과연 알고 있을까? 못 알고 있으면 내가 알려줘야지?'라는 의도로, "나 이뻐? 어디가?"라고 묻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질문에 답할 수 있으려면, 평소에 상대방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어렸을 적부터 변질된 병적 사랑에서 자라온 사람들은, 본인도 모르게 똑같은 방식으로 사랑하려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다 알려고 하고, 모든 것을 다 함께 하려고 한다. 상대방을 소유하고 지배하려고 한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여자는 상대방의 모친의 역할을 하려고, 남자는 상대방의 부친의 역할을 하려고 한다. 허나 상대가 모친이 되는 순간, 모친을 사랑할 수 있는가? 절대 불가능이다. 그러한 방식으로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다. 어릴 때 배운 잘못된 애착 & 사랑 방식을 버려야 한다.
혹은 아예 누군가와 어떠한 상호작용도 하지 않으려 할 수 있다.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당해온 무시, 억압, 폭력, 집착. 그런 경험에 질려버린 나머지 이제 상대를 철저히 존중해 버린다. 상대를 절대로 사랑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 특징이 있다. 분명히 친절한 거 같은데, 어딘가 모르게 냉정하고 싸늘하고 날카롭다. 정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 친밀성 상실이 미치는 영향
누군가와 친해지는 법을 모르는 사람들.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들. 친밀성 상실의 시대, 싸늘한 친절함이 전부인 시대. 이것이 개인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사회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나는 모든 현상을 미시적 차원과 거시적 차원으로 분리해서 바라본다)
- 미시적, 개인적 차원
친밀한 사이가 없으니 자연스레 외로워진다. 사는 게 힘들어지고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외로움 & 고독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들도 생겨난다. 사실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OECD에 속한 국가들 전체가 겪고 있는 문제이다. 하물며 영국에서는 외로움을 관리하는 장관이 있지 않은가?? (요새는 2030 대가 4050대에 비해 외로움을 더 느끼는 시대가 되었다. 정말로 기이한 현상이다)
생각해 보면, 개인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자명하다. 인간은 함께 살아가는 동물이다. 혼자서는 절대로 살 수 없다. 다른 말로, 인간은 '말하려고' 살아간다. 이 세상에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미친다. 그런데 누군가와 친밀해지는 법을 모르니,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얼마나 삶이 힘들겠는가?
- 거시적, 사회적 차원
1. 집단주의가 심해진다.
누군가와 새롭게 친해질 능력이 없다보니, 한국 사람들이 집단주의에서 벗어나질 못한다고 본다. '중간만 가자' 신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본다. 기존의 집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 집단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집단에서 튀는 행동을 하면, 눈치 주고 모함하는 것이다. 왜? 본인들은 집단에서 벗어나 다른 누군가와 친해질 능력이 없으니깐. 다른 사람은 그럴 능력과 용기가 있으니 배 아픈 것이다.
따라서 한국 사람들은 집단에서 튀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 '중간만 가자 = 평균만 하자'라는 신조가 지속되는 것이고, 그러니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 참 이중적이고 역설적이다. 남들과 다른 나만의 특별한 모습을 추구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이다. 이러한 욕망은 다 갖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국 사람들, 집단에서 튀는 것은 또 싫어한다. 즉, 남들과 같은 것을 싫어하면서도, 튀는 것 역시 싫어한다. 평범을 선망하면서도 거부하는 것이다. 참 복잡하고 피곤한 삶이다. 옷 입을 때 이런 특징이 잘 나타난다. 남들과는 똑같은 옷을 입을까 걱정하면서도, 내가 입은 옷이 다른 사람들과 너무 다를까 봐 걱정한다.
2. 신뢰가 사라진다.
또 다른 문제로는 세상이 너무 냉철해지고 잔혹해진다. 친밀한 사이에서는,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 잘못을 눈감아 줄 수 있다. 예를 들면 내 친구가 수업 시간에 살짝 늦었어. 그런데 꼼수를 부려서 출석 체크는 제시간에 맞춰 온 것으로 해둔 거야. 그런데 뭐 친구니깐, 이 정도는 눈감아 줄 수 있지 않은가??
사랑과 친밀성이 사라져 간다? 사회에 정이 사라져 가는 것이다. 점점 싸늘해지고 날카로워지고 냉철해진다. 연대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 결과 불특정 타인에 대한 신뢰도도 낮아진다. 왜? 누군가와 일상생활에서 친해지지 못하는데, 하물며 어떻게 불특정 타인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즉, 친밀성이 사라짐에 따라서, 사회의 신뢰도도 낮아지는 것이다. (한 사회의 신뢰도가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그 사회의 불평등은 늘어난다)
한번 생각해 보시라. 우리나라가 신뢰감이 높은 나라라 생각하는가? 전혀 아니다. 가방을 내버려 두고 다닐 수 있다고 해서 신뢰 사회가 아니다. 그건 감시 사회에 가깝다. 감시의 내면화가 된 사회. 여기서 말하는 신뢰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신뢰 사회란, 내가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었을 때 타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 지나가는 사람이 나를 도와줄 수 있다는 믿음이 있는 사회다.
당신이 길거리를 지나가다 넘어지면 그 누구라도 신경을 쓰는가? 그 누구라도 다가와서 괜찮냐고 물어봐주는가? 당신이 길을 걷다가 너무 힘든 일이 있어서 엉엉 울고 있다면, 누군가 와서 신경 써줄 것 같은가? 그럴 리 없다^^ 우리나라는 신뢰 사회가 아니다. 싸늘한 친절함이 지배하는 사회, 신뢰가 없는 사회, 그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3. 혐오와 증오의 확산
친밀성 상실 위기와 함께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 혐오와 증오의 확산이다. 혐오와 증오가 한 사회를 위협하는 수준까지 갈 수 있다. 작년 대선 때 이미 한번 겪어보지 않았는가? 사실 거창하게 대선까지 갈 것 없다. 대학교 온라인 커뮤니티 에브리타임을 봐도 그렇다. 거기서 혐오 증오가 나타나지 않는가?
사실 혐오의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무엇을 혐오하는지를 떠올려보면, 생존에 위협을 가하는 것들이다. 바퀴벌레를 보면 혐오스럽다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가? 이건 위험 신호에 대한 반응, 자연스러운 생존 반응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는 다르다는 이유로, 그 이유 하나로 혐오하고 증오한다는 것이다. 생존에 아무 관련 없는데, 누군가를 혐오한다. 이것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준 것이 나치이다. 유대인 학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유대인의 삶을 짓밟은 나치.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 학살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유대인을 사회의 병충해처럼 가스라이팅했다. 해충화 작업. 해충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정당하다는 서사를 부여한 것이다.
친밀성이란 무엇인가, 그 본질은 무엇인가. 흔히 사람들은 누군가와 비슷하기 때문에, 같은 것 때문에 친밀해진다고 생각한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본질은 그렇지 않다. 누군가와 친해진다는 것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친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가치가 있고 의미있는 거 아니겠는가? 진정한 친밀성과 사랑은 다른 것에 대한 환대에서 시작된다. (같음을 이유로 친해지려고 하는 것은 단순히 편을 만들기 위한 수법에 지나지 않는다)
진화도 다양성을 기반으로 일어난다. 즉, 다름과 차이가 있어야만 진화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다름과 차이를 구별하고 인정할수록 세상이 발전하는 것이다. 따라서 다름과 차이가 많아지는 것은 긍정적 신호이다. 증오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 아니다. 다양한 커피 맛과 커피 향이 느껴질수록 삶이 풍요로워지지 않는가?? 우리도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환대해야 한다. 기억하자, 친밀성 & 사랑은 다른 것에 대한 환대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
우리나라는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그동안 너무나 빠르게 성장하면서, 이런 가치들은 무가치하게 보았다. 이제 우리나라는 어제보다 더 나은 나라를 꿈꾸는 나라가 아니다. 어제와는 다른 나라를 꿈꾸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다른 것이 미덕이고, 차이가 희망이다. 다름을 환대해야 한다. 이것이 갖추어지지 않는 이상, 우리 사회의 친밀성은 더욱 상실될 것이고, 우리 사회의 혐오와 증오는 더욱 확산될 것이다.
- 어떻게 하면 친밀성을 기를 수 있을까
1. 시대가 변했다는 것을 인식하자. 이제는 친밀해지는 법을 배우고 익혀야 함을 깨닫자
과거의 친밀성 = 가족 단위로 이루어지는, 가만히 있어도 친구가 생기는. 총체적이고 전인격적인. 제한된 인원과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현재의 친밀성 = 개인 단위로 이루어지는, 주체적으로 노력해야 친구가 생기는. 부분적이고 끊임없이 조율하는. 언제든 옅어지고 다시 짙어질 수 있는.
일단 기본적으로는 시대가 변했다는 것을, 친밀성의 의미가 변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제는 누군가와 친밀해지는 법을 익히고 배워야 한다. (엄마와 대화하는 방식으로는 친구나 연인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2. 진정한, 영원한 사랑을 찾으려는 생각을 버려라.
진정한 사랑?? 고귀하고 영원한 사랑?? 그런 건 없다. 헛된 욕망이다. 우정도 마찬가지다. 그런 걸 기대하고 친구 & 연인을 만나면 금방 실망한다. 그런 걸 기대하고 결혼하면 반드시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이제 그런 것을 지향하는 시대는 끝났다. 과거에는 가능했을지 몰라도, 이제는 시대가 환경이 그렇지 않다.
그러면 어떤 사랑을 해야 하는가? 쉽게 말하면 강물처럼 사랑해야 한다. 강물을 떠올려 보아라. 장애물이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자연스럽게 갈라지고 멀어진다. 장애물이 사라지면? 다시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고 합쳐진다. 이렇게 사랑해야 한다. 물론 장애물이 있다고 해서 항상 멀어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때론 함께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다. 단지 때로는 장애물을 피해서 잠시 멀어졌다 가다, 장애물이 사라지면 다시 합쳐질 수 있는 태도도 필요하다는 뜻이다. '어떤 장애물, 어떤 고난과 시련이 있어도 우리가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이제는 모든 고난을 함께하는 관계는 없다. 총체적이고 전인격적인 친밀성은 없다. 부분적이고, 끊임없이 조율해야 하는 친밀성이 필요하다. 이런 친밀성은 훈련되지 않으면 몹시 피곤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친밀성을 익히고 배우고 훈련해야 한다. 더 이상 단순히 오래 만난 다고 좋은 친구가 아닌 것이다. 이제는 상황과 맥락에 따라, 매 순간 서로 조율하고 합의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좋은 책이란 무엇인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야만 이해되는 것이 좋은 책일까? 아니다. 그러한 책을 읽으면, 책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이 책의 의미와 정답을 찾으려 한다. 그러면 책이 재미없어진다. 놀이가 아닌 노동이 된다. 좋은 책이라 함은 입구와 출구가 없는 책이다. 어디든 입구가 될 수 있고, 어디서든 출구가 될 수 있는 책. 언제든 편하게 들고 편하게 덮을 수 있는 책, 그것이 좋은 책이다. 사람도 비슷하지 않을까?? 모든 순간, 모든 영역에서, 모든 것을 함께하려는 사람은 피곤하다. 언제든 편하게 만남을 시작할 수 있고 (입구), 언제든 부담 없이 헤어질 수 있는 (출구). 그런 사람이 요즘 시대의 걸맞은 좋은 사람 아닐까??
3. 쉽게 생각하라. 계산 없이 그냥 만나라.
지금 이 순간 좋으면, 그저 좋은 것으로 만족할 능력이 필요하다. 그저 현재를 즐기면 된다. 복잡하게 머리 쓰지 말고, 계산 없이, 몸 가는 대로. (당신이 머리로 계산하면 반드시 상대방은 알아차린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머리를 쓴다. 계산한다. 왜? 나중에 자신이 상처받을 것이 두려워서, 자신의 감정이 털리는 것이 두려워서다. 못난 놈들이다^^
감정도 일종의 자산이자 자본이다. 그런데 감정은 반드시 소모되고 털릴 수밖에 없다. 누군가와 만나 친밀성을 쌓기 시작하면, 감정 교류를 하게 되면 반드시 어느 순간 상처가 온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친밀하면 친밀할수록 그 상처와 고통은 커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작용 반작용 법칙과도 같다. 상처가 두려운 사람, 상처를 받지 않으려 하는 사람은 누군가와 진정으로 친밀해질 수 없다.
상처를 받으면 감정이 소모되고 깎인다. 자신의 감정 자산이 빈약해지는 것이다. 그런 상태가 되면 누군가를 쉽사리 못 만난다. (다들 이런 적 있지 않은가, 시련 이후 '나 다시는 연애 안 해!'라고 다짐했던^^) 그런 상태가 두려워서, 자신의 감정이 소모되고 털리는 것이 두려워서, 그래서 찌질하고 비겁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더 나아가서는 아예 시작조차 안 하는 사람이 있다.
감정의 강자들은, 감정의 부자들은 그런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감정이 충만하니깐, 잠시 깎이더라도 다시 풍요로워질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감정조차 빈익빈 부익부가 적용된다. 감정이 털리면 털릴수록, 감정은 더욱 풍요로워진다. 그들은 이미 깨질 각오를 하고, 박살 날 각오를 하고 누군가를 사랑한다. (모든 관계에는 반드시 끝이 있기 마련이니깐)
친밀성, 우정, 사랑이라는 것이 별 게 아니다. 그리 특별하고 위대한 것이 아니다. 두려워 말고, 복잡하게 계산 말고, 그냥 만나라. 쉽게 생각하라. 남녀가 만날 때도, 굳이 남녀 관계로 생각하고 만날 필요가 없다. 그냥 만나서 친구가 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한 번뿐인 인생, 뭐 그리 복잡하게 사는가
4. 주체적으로 친밀성을 쌓아야 한다.
어렸을 적 엄마들이 말한다, "학교 가서 나쁜 친구 사귀지 말고, 좋은 친구 사귀어라~". 근데 학교에서 좋은 친구, 나쁜 친구를 어떻게 구별하지??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란 따로 없다. 애초에 좋고 나쁜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나하고 사이가 좋으면 좋은 사람, 사이가 나쁘면 나쁜 사람인 것이다. 나와 사이가 어떤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나에겐 좋은 사람일 수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나쁜 사람일 수 있는 것이다. 혹은 아무리 다른 사람에게는 나쁜 사람이더라도, 나와 좋은 매개로 만나,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 있으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단어도 잘 살펴보면, '인간 = 人間 = 사람 인 + 사이 간'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따라서 누군가를 만날 때는 '사이'가 중요해진다. 즉, 어떤 '매개체'로 만나느냐가 중요해진다. 술을 매개로 만나면 술친구, 음악을 매개로 만나면 음악 친구, 클럽을 매개로 만나면 클럽 친구, 책을 매개로 만나면 책 친구가 되는 것이다. 좋은 매개채로 만나면 좋은 친구, 나쁜 매개채로 만나면 나쁜 친구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를 만날 때, 이 사람이 좋은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그런 걸 고민하는 게 아니라, 이 사람과 어떤 사이, 어떤 매개로 만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더 나아가 지금은 나와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 있지만, 언제든 상황과 맥락이 달라지면, 나쁜 사이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민감하고 예민하게, 끊임없이 관계를 조율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누군가와 친해지기 전 반드시 나 자신에 관해 먼저 알고 있어야 한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를 묻기 전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부터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내가 어떤 매개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싶은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다양한 매개를 경험해 보면서 내가 좋아하고 관심 있는 매개를 알아 두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매개를 자꾸 확장시켜야 한다. 다양한 매개를 만들어둬야 한다. 그것이 좋은 관계, 좋은 사이를 만들고 유지하는 핵심이자, 삶을 풍요롭게 즐기는 방법이다. 즉, 이제는 개인의 주체적 노력이 필수적인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와 좋은 사이를 오래 유지하고 싶다면, 그 사람과 다양한 매개를 이용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되는 것이 필요하다. 여러 방식으로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 나의 이야기
최근에 '판플러스 인문 지혜 장학생'이라는 아주 좋은 매개체로 만난 사람들이 있다. 좋은 사람들이 참 많더라. (물론 모든 사람이 좋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느끼는 비율이, 그 어느 집단보다, 정말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들과 함께 독일 여행을 하면서 참 많이 웃고, 배우고, 깨달았다. 그들과 함께하면서 그들의 공통점 2가지를 발견했다.
1. 어른이다
어른이란 무엇일까?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나의 모순을 받아들이는 것, 내가 취약하다는 것을, 내가 못났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독일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집단보다도 그 비율이 현저히 높았다)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이를 무의식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말과 행동에서 티가 나더라
2. 배울 능력이 있다
독일 여행이 끝난 이후 몇몇 사람들에게 안부 메시지를 전했다. 그런데 내가 모두에게 '덕분에 많이 배웠다. 고맙다'라는 이야기를 하더라. (메시지를 다 보내고 나서야 깨달았다.) 놀라운 점은, 다른 사람들도 '덕분에 배웠다'라는 말을 해오던 것이다. 이 말을 듣고 '과연 뭘 배웠을까??^^'라는 생각도 들더라 ㅋㅋ. 근데 뭐, 많이 배워가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는가^^ (가끔은 이런 허세에 가까운 나르시시즘이 필요한 법이다. 이럴 땐 그저 '재수 없다' 생각하며 가볍게 넘어가시면 된다^^)
다시 돌아와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는 것도 엄청난 능력이라 생각한다. 나는 누구를 보더라도 '덕분에 배웠다'라는 말을 어느 순간부터 해왔다. 못난 모습을 보면 '나도 저런 모습이 있나?' 혹은 '나는 저렇게는 안 살아야지'라는 생각을 하고, 좋은 모습을 보면 '저건 나도 나중에 써먹어야겠다'라는 생각을 한다. 이런 태도를 지니고 있으면 모든 사람에게서 배울 수 있고, '덕분에 배웠다'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되더라. 아마 독일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도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친밀성에 관한 글을 썼지만, 그렇다고 내가 누군가와 친밀해질 능력이, 사랑할 능력이 완벽하다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서툴고 투박하다. 찌질하고 모지란 짓도 많이 해봤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는 거 아니겠는가.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데이터화할 수 없는 무언가를 아는 것이다. 그러니 복잡하게 짱구굴리지 말자. 데이터가 될 수 없는 것인데, 처리할 데이터가 없는데, 머리 굴려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저 몸이 가는대로, 순간순간 현재를 느끼며, 사람답게 사랑하며 살아가라 (이것은 꾼들이 주로 써먹는, 최고 수준의 자기 합리화이다^^)
철학자 박구용으로부터 비롯된, 이정환 생각이었습니다.
센서빌러티; 예술을 즐기는 능력, 그리고 어린왕자의 죽음과 부활 (3) | 2023.07.31 |
---|